꾸르를 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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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7 00:48

현자의 유산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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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공을 질주하는 솔개의 비행을 주시하는 한 쌍의 눈이 있다사냥감을 찾아 해매는 솔개의 입장에서 보자면 터무니없을 만큼 머나먼 위치에 존재하지만땅 위를 걷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높은 곳에 위치한 두 눈은 지루함을 가득 담은 채 솔개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커다란 하품과장된 동작으로 기지개를 켜는 거구의 사내는 급격하게 가늘어지는 호박빛깔의 눈을 돌려 그 옆의 유달리 작은 남자를 훔쳐본다.남다른 덩치의 사내 옆에 서 있으니 작아 보이는 것도 당연 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후드를 뒤집어 쓴 그 남자는 왜소한 체구 덕분에 더욱 작아 보였다.

 사내는 무료함을 견디다 못해 짜증을 느꼈다노골적인 사내의 의사표현에도 아랑곳 하지 않으며 벌써 몇 시간 째 같은 젋벽만을 바라보고 있는 일행이 못마땅했다.사내는 호박색의 눈을 돌려 절벽을 쏘아보았다.

 가파르게 깎여나간 그 절벽은 상상했던 것 보다 볼품없는 곳이었다높이나 지름 등은 기껐해야 조금 커다란 통나무집 수준에 불과했고그마저도 이곳저곳이 붕괴되어 뼈대만 남은 것 같은 앙상한 모습이었으며결정적으로 절벽의 대부분을 구성해야 할 반대편의 언덕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다시 말 해 이것은 절벽이라고 부를 수 도 없는 단순한 흙과 돌로 구성된 벽이었으며그마저도 도시 한복판에 부자연스럽게 자리잡은 부조리의 산물인 것이다.

 사내의 못마땅한 눈초리가 절벽 중앙을 노려본다거기에는 인위적이어야 하지만 절대로 인위적인 것 같지 않은 조형물이 묻혀있었다아니뭍혀있었다기 보다는 처음부터 절벽이었던 부분을 깎고 다듬어 만든 조형인 것 같았다그 섬세한 표현과 세밀한 조형으로 보아서는 어떻게 보아도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지만조형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투박함과 절벽 전체를 아우르는 일체감을 그것이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라 속삭이고 있었다.

 마도사 지드. 300년 전 한 나라를 괴멸시킨 마법사 집단 푸른 수정구의 총수겉으로는 왕실의 충성스런 마법사였지만속으로는 비밀결사의 총수로서 나라를 전복시킬 계략을 꾸미던 대악당결국 그의 비열한 음모대로 그가 섬기던 하나의 왕국은 하룻밤에 전멸해 버렸고그러한 악행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그 시대의 현자붉은 장검의 리케룬에 의해 비아르산(당시만 해도 산이었던)에 봉인되고 말았다.

 장렬한 전투와 함께 산은 거의 흔적도 남지 않을 만큼 사라져 버렸지만세월이 지나고 봉인된 마도사 지드는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하나의 여흥으로 전락해 버렸고그렇게 아무것도 남지 않은 비아르 산에는 관광객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으니당연하게도 그들을 상대하는 장사꾼들이 들어서게 되었으며그것은 얼마 가지 않아 마을을 구성하게 되었다그리고 다시 세월이 지나 마을은 도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가이드가 들려준 도시의 유래를 떠올려본다사내는 그 이야기가 터무니없이 과장된 전설이라 생각했다. 300년 전의 전투가 사실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커다란 산이었다는 절벽은 단순한 동산정도의 크기였을 것이며흙으로 만들어진 마법사는 손재주가 뛰어난 누군가의 작품일 것이다.사내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눈을 돌려 작은 남자를 훔쳐보았다.

 “처절한 싸움이었어

 갑작스럽게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사내는 깜짝놀라 그를 돌아보지만딱히 뭐라 대답 할 수는 없었다작은 남자의 말이 계속 되었다.

 “열 하루 하고도 아홉시간을 더 싸웠지알고 있는 모든 마법을 쏟아 부었고더 이상 팔이 움직이지 않게 될 때까지 검을 휘둘렀어그자는 강했고생각했던 것 보다 더 교활했지최후의 일격을 먹이려고 결심했을 때 느닷없이 튀어나온 소환수는 정말 감탄 할 수 밖에 없었어

 사내는 눈앞의 작은 남자가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것인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머리가 이상해져 버린 것일까마법사들에게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증상이라 들었지만 이건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사내의 눈빛은 이윽고 걱정스러운 감정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작은 남자는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것이겠지긴 싸움으로 많은 마력을 소진한 그자로서는 소환수를 제어할 수가 없었던 게야푸른 광체의 소환수는 그대로 그자에게 돌진하기 시작헸네덕분에 그자는 꽁꽁 숨겨두었던 모든 비장의 수를 펼쳐 보일 수밖에 없었어나로서는 운이 좋았던 거라고 해야 될까잘 모르겠군어쨌든 그자는 알몸으로 내 앞에 던져진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가 되었지

 말투는 영감이나 다름없었지만목소리는 가느다란 것이 남자는 아무래도 아직 소년인 것 같았다사내는 소년의 전혀 다른 말투와 목소리에 위화감을 느끼며 그가 오늘 아침에 무엇을 먹었는지 생각하는 중이었다딱히 잘못 먹은 것은 없는 것 같다그렇다면 대체 뭐가 문제일까?

 “돌이켜보면나는 그 때 왜 그를 죽이지 않은 것일까 의문스러워그를 죽일 수 있는 마법도검을 휘두를 체력도 분명 남아있지 않았지만남은 힘을 쥐어짜내면 그자의 심장에 검을 꽃아 넣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네마지막 순간까지 남겨두었던 봉인 마법의 양피지를 펼쳐 그를 봉인하는 것이 최선이었지

 사내는 다시 눈을 돌려 절벽 중앙의 조형을 전력으로 노려보고 있었다저 녀석이다소년이 느닷없이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게 된 원인은 저 녀석밖에 생각 할 수 없었다몇시간이나 정신나간 마법사의 조형을 바라보고 있었더니 섬세한 소년마법사의 두뇌가 그 악랄한 정신 오염을 견디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사내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미안해 칸

 당장이라도 절벽을 향해 해머를 집어 던질 생각이던 사내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년을 돌아보며 한숨짓는다.

 “괜찮은 거냐리오

 소년은 고개를 살짝 움직여 긍정을 표시하고는 다시 절벽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이상하지?”

 “이상해

 “스승님이 들려준 이야기야정확히는 사조님이 스승님꼐 들려준 이야기였대

 거구의 사내는 새삼 놀란 얼굴로 다시 절벽을 바라보았다그렇다면 가이드가 들려준 이야기의 대부분이 사실이란 말인가칸은 놀라운 기분과 어처구니없는 현실의 괴리를 동시에 느끼며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마법이란 이렇게도 터무니없는 힘이란 말인가.

 “나도 반쯤은 허풍이라 생각했던 이야기였어산 하나를 날려버린 마법사의 전투라니이 광경을 직접 보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그렇게 생각했겠지

 이제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추억속의 전설과 마주한 순간 그 시절의 어린아이로 돌아간 자신이 어쩐지 부끄럽게 느껴졌다한껏 부풀은 감동과 흥분을 진정시키며마법사는 일행을 돌아보았다사내의 시선은 어느새 다시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빼애애애액!

 솔개의 울음소리였다먹이를 찾아 창공을 헤매던 솔개는 어느덧 배를 가득 채울 그날의 식량을 두 다리에 꽉 붙들고 보금자리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전사 칸은 하늘을 일직선으로 가로지르는 솔개를 바라보며 어느 사이엔가 서녘으로 사라져가는 태양의 존재를 알 수 있게 되었고그러고 보니 점심때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야 말았다.

 용사 리오는 후드를 벗으며 웃음 짓는다짧지만 아름다운 검은 머리가 바람을 타고 나부낀다오늘은 오랜만에 스승님과의 추억에 젖어있을 수 있었다칸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리오로서는 너무나도 소중하고 행복한 추억의 시간이었다.

 리오는 생각했다미안한 만큼오늘 저녁은 칸이 좋아할 만한 걸 사주어야겠다고.



 1


 비아르 아이레시의 남쪽 지구에 위치한 마법사의 계곡은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에야 술을 팔기 시작하는 게으른 여주인 로안이 운영하는 여관이다젊음과 미용그리고 그녀 자신의 행복함을 위해 하루 대부분을 잠에 투자하는 요염한 부인은선대로부터 여관을 물려받은 이래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광경을 바라보며 넋이 나가 있었다.

 “이 용광로에 처넣어도 못써먹을 고철같은 자식아그 호박파이가 왜 니 입으로 들어가냔 말이다마차 바퀴에 짓이겨서 돼지먹이로 줘버릴 놈 같으니!”

 “허리를 숙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 똥자루 주제에 뭐가 어쩌고 어째그리고 내 훈제 양고기를 먼저 처먹은 놈이 누군데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덤벼그 짜리몽땅한 몸뚱이를 반으로 접어주마!”

 로안은 홀의 한복판에서 서로를 향한 격렬한 감정을 상스러운 언어 표현으로 나열하며그 험악한 망치와 도끼가 뜨겁게 달구어질 듯한 회합을 한 시간 째 반복하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것은 매우 이상한 광경이었다청동빛깔의 동체와 검은 가죽을 덧댄 자루로 이루어진 거대한 워해머를 나무망치 다루듯이 휘두르는 전사는 전설 속 거인의 후손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체구의 사내였으며반대편에서 얼마나 많이 사용했는지 시뻘건 핏자국이 눌어붙은 흉측한 배틀액스를 내려치는 드워프는 전형적인 그들 종족 특유의 신체구조에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을 것 같은 체형의 소유자인 것이다그렇지만 놀랍게도 두 사람은 싸움을 하고 있었다.

 로안은 이 돈 주고도 보지 못할 기묘한 상황을 그만 종식시키기 위해 껄끄러운 경비대장 하비를 가게로 불러들이는 것을 고민하기 시작하였다.좀 더 지켜보고 싶었지만그러다 둘 중 누군가 죽어나가지 않을까 걱정되었고마침내 그녀의 사고가 하비에게서 선물 받은 고급 향수를 떠올렸을 무렵이었다.

 “경비대는 부르지 않으실 건가요?”

 돌연히 들려온 목소리에 로안은 고개를 돌렸다유난히도 왜소한 체구의 검은 머리 소년이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짧지만 아름다운 검은 머리칼에 잠시 눈을 빼앗긴 로안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눈앞의 소년이지금 홀에서 난동과도 같은 결투를 벌이고 있는 두 사람의 일행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글쎄요아직까지 이렇다 할 피해가 있는 것도 아니고한 창 달아오르고 있는 두 전사분의 혈투를 일개 아녀자가 찬물을 끼얹어도 되는 걸까 잘 모르겠네요

로안은 미소 지었다당황한 마음을 숨기려거든 미소만한 것이 없다선대의 가르침을 떠올린 그녀는 자연스럽게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모르긴 몰라도 이 도시에서 여관을 찾는 남자들 중 절반은 로안을 만나기 위해정확히는 그녀의 자랑거리를 감상하기 위해 모여드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행이 소란을 일으킨 것 같군요잠시 실례 하겠습니다

 무덤덤하게 지나가는 소년을 바라보며 로안은 묘한 흥미와 안도감을 느꼈다가녀리다고 밖에 표현 할 수 없는 그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기대감이 그녀를 흥분케 했다저런 작은 소년이 덩치 큰 전사와 험악한 드워프를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까유달리 작아 보이는 저 몸으로 홀에 가득한 인파를 제치고 둘에게 다가갈 수나 있을까?

 그녀의 우려대로 중앙을 가득 메운 군중에 좀처럼 비집고 들어갈 틈을 찾지 못한 소년은 잠시 멈춰서 고민하고 있는 듯 했다병장기가 충돌하는 강렬한 소리와 제멋대로 떠들어대는 주위의 소음으로 인해 소년의 목소리는 중앙의 둘에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잠시 후 무언가를 떠올린 듯 소년은 둘러맨 가방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소년이 꺼내든 그것은 얇고 넓적한 한권의 책이었다여행자 전서속칭 까만책이라 불리는 그것은 이른바 검증받은 여행자의 증표이다나름대로 잔뼈 굵은 여관주인인 로안도 근래 자주 볼 수 없던 그 까만색의 도서는 조합이 주관하는 한 가지 시련의 증거이기도 하다소년을 바라보는 로안의 눈빛이 달라졌다.

 까만 책이 펼쳐지고 시간이 조금 흘렀다좀처럼 볼 수 없는 굉장한 사투가 무르익어가며 그것을 지켜보다 덩달아 달아오른 관중들이 편을 갈라 장외 난투를 시작하려 들 즈음이었다.

 아주 작은 뒤틀림이었다귓가를 간지럽히는 작은 노이즈가 모두를 거슬리게 했다그렇게 큰 소리는 아니었다한껏 땀을 흘리는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소음에 비하면 참새가 지저귀는 정도에 불과했다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그 소리가 신경 쓰였다.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두 번세 번네번.

 하나.

 그리고 마침내 모두가 한 방향을 돌아보게 되었다.

 후드를 눌러쓴 작은 마법사가 모아 쥔 두 손을 펼쳐보였다.

 번쩍!

 순식간에 뿜어져 나온 섬광이 모든 것을 뒤덮는다거슬리는 소리에 정신을 뺏긴 사람들은 무자비한 빛줄기에 무방비로 집어삼켜져 버린다전사 칸드워프 타보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불시에 시야를 얻어맞은 좌중들은 저마다의 감상을 격하게 표현하며 바닥을 뒹군다.

 하나같이 두 눈을 부여잡고 어린아이마냥 괴성을 질러대는 사내들을 피해 유유히 중앙으로 걸어 들어간 소년 마법사는 적당한 빈자리에 걸터앉아 아무도 볼 수 없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여기메뉴 좀 가져다주세요!”




 2


 다시 한 번 산더미 같은 음식들이 눈 녹듯이 사라져갔다무엇이든 가리지 않는 두 사람의 식성을 고려해 각 음식들은 모두 두 접시씩 추가로 주문되었고여주인 로안은 기쁨의 비명을불행한 주방장 고든과 웨이트리스 다니아는 고통의 절규를 질러야 했다.

 끈임 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마술과도 같은 광경에 시력을 회복한 구경꾼들은 다시금 흥분하였고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모습에 감화되어 갔다.너도나도 같은 음식을 주문하는 손님들의 모습에 아름다운 여주인은 다시 한 번 환호성을 내질렀고웨이트리스는 울상을 지어보였다주방장은 말 할 것도 없었다.

 한 시간 이상 지속된 광란의 연회는 일부 식재료의 고갈과 주방장의 파업선언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는데아쉬운 표정으로 숟가락을 내려놓은 두 사람은 그제야 대화를 시작할 마음이 생긴 것 같았다맥주와 안주가 추가로 주문되었다웨이트리스는 서둘러 장바구니를 챙겨들었고주방장이 냄비를 집어던지는 소리에 주방이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그래서그 놈들이 원하는 게 뭐야?”

 “어떤 놈의 목이라도 따달라더냐?”

 칸은 약간 들떠 있었다반대로타보는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마지막에 벌어진 블랙 푸딩 쟁탈전의 승자가 칸이었기 때문이다.

 “안됐지만 암살 의뢰는 받지 않는 주의에요타보

 지금 당장이라도 피 뭍은 도끼를 꺼내들 것만 같은 얼굴이던 드워프의 표정이 한 층 더 찌푸려진다그의 머릿속에는 단 한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푸딩에 대한 아쉬움과공정한 입회인의 주도하에 정정당당하게 펼쳐진 승부에 대한 미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위를 냈어야 하는 건데.”

 측은함 마저 느껴지는 타보의 깊은 한숨에 한 층 기분이 좋아진 칸은 단숨에 잔을 비우고 추가 주문을 하였다만면에 미소를 가득 머금은 여주인 로안이 직접 맥주와 홍차를 들고 나타났다그녀는 아낌없이 돈을 쓰는 소년 마법사가 범상치 않은 신분의 인물일 것이라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무엇보다 소년의 검은 머리가 그녀의 직감에 확신을 더해주고 있는 것이다.

 로안은 서비스로 가져온 고급 홍차에 벌꿀과 우유를 듬뿍 집어넣으며 남자의 애간장을 녹이는 화사한 미소와 함께 소년에게 그것을 건네주었다.

 후드를 눌러쓴 소년리오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웃음으로 그것을 받아든다.

 “필요한 게 있으시거든 또 불러주세요

 기품 있는 표정으로 자리에 돌아가는 로안은 웃는 얼굴이었지만 내심 분해하는 것 같았다어쩌다 오늘 입은 셔츠가 너무 얌전한 것일까단순히 남자라 하기엔 너무 어린 소년이기 때문인 것일까어쩌면 여자를 싫어하는 것이 아닐까…….

 친해져서 손해 볼 건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쉽지 않은 상대를 만난 것 같다로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문제의 일당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소년은 가방을 뒤적이며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이 꺼내든 것은 여러 번 접히고 이곳저곳 구겨져 언뜻 보면 쓰레기나 다름없어 보이는 종이 한 장 이었다리오는 그것을 펼쳐서 내용을 알아 볼 수 있게 한 다음 이번엔 품에서 비교적 깔끔하게 접힌 종이를 꺼내더니 두 장의 내용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두 장의 문서를 정성껏 접어 다시 품에 집어넣은 리오는 천천히 후드를 젖히고 밝은 표정으로 타보를 바라보았다.

 “기뻐하세요드디어 찾았어요리케룬의 유산!”

 쓰디쓴 흑맥주의 맛을 음미하는 중이었을까볼썽사납게 구겨져있던 드워프의 얼굴에 생기가 돌아온다난쟁이답지 않은 짧은 수염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흥분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잠시 숨을 고르며 남은 맥주를 전부 들이켠 타보는 상기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디 있더냐?!”

 리오는 주변이 고요해 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눈앞의 드워프는 물론 지금 이 홀에 모여앉은 모든 인물들이 소년의 다음 한 마디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3


 나라가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있다기만의 마도사가 일으킨 거대한 절망을 단죄하기 위해 지팡이를 집어 던지고 검을 꺼내든 남자의 이야기였다.

 남자의 전설은 매우 화려했다많은 전투에서 활약했고많은 생명을 구해내었다그를 사모하는 여성은 대륙 어느 곳에나 흔히 있었고실제로 그와 염문을 만들어낸 여자는 양손가락이 모자를 정도였다.

 그 중에서 특히 유명한 일화는 하얀 여왕과 빛나는 보석이었다만년설로 뒤덮인 북부의 어딘가에서 얼음으로 만들어진 고성을 홀로 지키며 살고 있다는 하얀 여왕그녀의 내면에서 만들어진 빛나는 하얀 보석은 겨울을 담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것은 거대한 힘이며 강력한 마력이다많은 이들이 그것을 찾아 나섰고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붉은 검의 현자는 일곱 난장이들의 도움을 받아 다섯 가지 시련을 뛰어넘어 마침내 여왕을 만나게 되었다.

 지난 밤 떠돌이 악사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는 여기까지였다전사 칸은 그 직후에 벌어진 피 튀기는 난장판을 떠올리며 떠돌이 반요정을 지켜내지 못 했던 굴욕을 떠올린다남자도 반할 만큼 가녀린 목소리가 인상적인 하프-엘프였다.

 지금부터 찾아 나설 현자의 유산은 안타깝게도 하얀 보석이 아니라고 한다유일하게 알고 있는 유산이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 실망한 칸이었지만 사실 유산 같은 것은 그에게 있어 아무래도 좋은 물건이다그것들을 원하는 사람은 선두에 나서 들뜬 기분을 험악한 인상으로 표현하는 땅딸보와 자신의 옆에서 나란히 걸으며 무언가를 끈임 없이 생각하는 작은 마법사였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앞서가던 드워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전사와 마법사는 금세 거리를 좁혀왔다그들이 멈춰선 곳에는 커다란 문이 서 있었다둔중한 짙은 회색으로 칠해진 그 거대한 문은 양 옆으로 높다란 담장을 거느리고 있었고길게 늘어선 담장은 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먼 곳 까지 뻗어 있었다터무니없이 넓은 이 저택은 전임 시장의 사택이다.

 보르코 아이레이 저택의 주인이었던 전임 시장은 300년 전의 전투 이래 관광지가 되어간 아이레에 정착해 도시를 세우고 초대 시장을 역임했던 토르즈 아이레의 후손이다시장으로서 유능하여 많은 시민의 지지를 받았지만 부패한 정치인으로서 온갖 비리를 저질러 무수한 지탄을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리오는 조합에서 제공한 아이레의 정보를 떠올리며 거대한 문 앞에서 일행을 보고 있는 경비병에게 다가간다.

 “조합에서 나왔습니다코델리아 아가씨를 뵙고 싶은데요

 품에서 꺼내든 조합의 인장이 찍힌 의뢰서를 경비병에게 건넨다경비병은 서류를 대충 훑어 인장을 확인하고는 손짓을 통해 개문을 지시하며 의뢰서를 돌려주었다.

 “아이레 저택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저는 경비대장 하비라고 합니다

 돌려받은 의뢰서를 품에 넣은 리오는 가벼운 예를 표하고 일행과 함께 정문을 통과한다정원은 매우 넓었지만 정문에서 현관까지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넓기만 하지 황량한 정원이로군

 겨울이 막 지나간 봄의 초입이건만 저택의 정원에서 봄의 싱그러움은 찾아보기 힘들었다정원에 걸맞게 널따란 화단은 꽃은커녕 잡초 하나 없이 흙더미만 쌓여있었고 듬성듬성 심어져 있는 나무는 가지가 제멋대로 자라있었다정원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눈에 들어오는 고풍스런 석조 파고라와 가장자리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지어진 경비병들의 숙소 같은 것을 보면 분명 가드닝에 공을 들인 흔적이 있는 정원이지만 어째서인지 현재는 관리를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차가운 봄바람에 쓸쓸함 마저 묻어나는 것 같았다리오는 현관문을 정중하게 두드렸다.

 

 저택의 정원은 어머니가 관리하였다꽃에 물을 주는 것부터 나무의 가지를 치는 것까지 저 넓은 정원을 그녀 혼자 돌보았다고 한다덕분에 이 저택에는 정원사가 필요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것을 내팽겨 친 것은 사랑하는 외동딸이 사라진 이후부터였다정확히 말하자면 정원을 돌볼 정신이 없었다매일같이 딸을 찾아 거리를 헤맸고그러한 일상이 반년 간 반복되자 마침내 정신이 나가버렸다고 한다코델리아는 슬픈 눈으로 정원을 바라보았다창문을 열어두기엔 쌀쌀한 날씨였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 저택은 코델리아의 조부가 사랑하는 딸을 위해 그녀의 열다섯 생일을 기념하여 만들어졌다보르코 아이레당시 아이레의 시장이었던 그 남자는 부인을 잃고 하나 남은 딸만이 삶의 전부라 여기는 사내였다고 한다.

 저택의 늙은 하인은 그 시절을 바로 어재처럼 기억한다고 말했다.

 “주인님이 저 파고라에 돌아가신 마님의 이름을 붙이는 건 어떠냐고 물어보셨죠아가씨는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아가씨가 출가하실 때에는 그야 말도 아니었습니다일은 물론이고 식사도 제대로 안 하셨죠끝내 데릴사위로 들이셨답니다.”
 “그리고…….”

 하인은 코델리아를 보며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다주름진 눈가에 눈물방울이 맺혀갔다.

 “그래도 이렇게 아가씨가 돌아오셨으니 주인어른도 분명 기뻐하실 겁니다

 하인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코델리아는 참담한 기분을 느꼈다아이레의 작은 아가씨가 사라지고 10그 10년 동안 많은 것이 망가져 버렸다.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안타까운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다마침내 그 이상한 삼인조가 문 앞에 도달한 모양이다문이 열리고 예쁘장한 소년 하인과 함께 세 남자가 걸어 들어온다모두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같은 험악한 인상의 소유자들이지만 특히 그들을 괴상한 집단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은 그들의 종족이었다.

 “만나서 반갑군

 가늘고 긴 혀를 날름거리는 화법이 인상적인 푸른 비늘의 인물이 후드를 벗으며 말한다리저드맨스스로를 용인이라 칭하는 자존심 강한 일족의 후예가 자기소개를 시작하였다.

 “나는 신 루 칼리소보시는 대로 용인이며 용병이오

 커다란 키와 남성적이고 위압적인 말투가 아니라면 아마 남성인지 여성인지 분간하지 못했을 것이다그 목소리는 잔뜩 쉬고 거칠었지만 인간으로 치면 남성 보다는 여성에 가까운 느낌이었다코델리아는 눈앞의 리저드맨이 사실은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다른 일행을 둘러보았다.

 “김 버독이라 하오찾는 것이 있어 여행을 하는 중이오

 삿갓을 눌러쓴 코볼트는 머나먼 나라에서 찾아왔다고 한다그 행동거지는 매우 정중했고 이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른 코볼트와는 어딘가 다른 품위를 가지고 있었다.

 “달로우용병이오

 마지막 한 사람은 무려 트롤이었다그는 커다란 덩치를 감싸는 풍성한 로브를 걸치고 작은 기둥만한 크기지만 매우 세련된 지팡이를 들고 있었으며 그 험악한 인상에 어울리지 않는 점잖은 유리 안경까지 착용하고 있는 굉장히 인상적인 모습이었다다른 두 사람도 매우 독특한 방문자라는 생각을 했지만 이 남자는 트롤이라는 종족에 대한 인상을 완벽하게 거부하는 차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코델리아의 감상이다.

 늙은 하인과 소년 하인을 물러가게 한 코델리아는 달로우에게서 의뢰서를 건네받았다그것은 분명 여행자 조합인 발자국에서 발행하는 진품 의뢰서였고 그 하단에는 조합의 도장과 코델리아 자신의 친필 서명이 적혀있었다.

 “이상하네요

 의문에 찬 여인의 한마디그렇다 그 의뢰서는 존재할리 없는 의뢰서인 것이다코델리아는 바로 어재 이것과 같은 내용같은 인장과 같은 서명이 적힌 의뢰서를 들고 온 일행이 있다는 사실을 얘기하였다.

 “어떤 자들이었소?”

 리저드맨의 표정엔 익숙하지 않은 코델리아였지만 지금 눈앞의 용인이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인다는 사실은 누가 보아도 명백한 것 같았다반면 삿갓을 눌러쓴 코볼트와 유리 안경을 치켜 올리는 이상한 트롤은 제법 침착한 얼굴로 상대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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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예전부터 썼던 소설인데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아 그냥 누가 좀 보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올려봅니다. 

읽어보신다음 괜찮으시다면 감상을 들려주시길 바랍니다. 

비평도 감사히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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